[Day 4] 2025 유럽 종교개혁 성지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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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9회 작성일 25-11-0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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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간밤에 도착한 라이프찌히는 (구)동독에 속했던 곳인데 호텔 로비가 아주 작고 모여서 예배할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식사하기전 식당에 모여 오늘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하고 출발합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순례하는 곳은 St Thomas church 인데 이곳에서 루터가 설교를 하고 이 지역에 루터교가 정착 잘 정착되도록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예배당 구석에 있는 과일 나무에 달린 사과가 올 한해 성토마스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올 한해 새누리에서 헌아식한 아이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싶었는데요, 신앙을 잃어가는 독일땅에 회복과 부흥이 물결이 일기를 기도합니다.
이 교회는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운 바하 (Bach)가 1723년부터 175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음악 감독으로 봉직하며 매주 새로운 칸타타, 오라토리오, 그리고 유명한 《마태 수난곡》 등 바로크 음악의 걸작들을 작곡하고 지휘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바하가 쓰던 오르간을 따라 만든 오르간으로 교회에서 특별히 연주를 해주어서 오르간 음악을 배경으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새누리의 오케스트라 자매님들, 음악 전공한 자매님들, 음악전공한 자매님 친구들까지 바하 동상과 사진을 찍으며 좋은 추억을 남겼습니다.
이곳은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5일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 요한 에크와 공개 신학 토론을 한 곳인데 플라이센부르크 성 대신 지금은 신)시청사가 세워져있습니다. 이 논쟁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후, 그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검증하고 논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가톨릭의 교리와 전통을 내세우는 요한 에크의 주장은 오직 말씀에 (Sola Scriptura) 근거한 루터의 주장을 무효화 할수 없었고 공의회 또한 실수를 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사실상 로마가톨릭과 결별을 선언한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니콜라이 교회입니다. 내부가 에메랄드색 페인트와 크림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교회였는데, 허가가 없으면 사진을 찍지 못한다고 해서 아쉽게 외부 사진만 찍어왔습니다.
니콜라이 교회는 독일 통일 역사에서 너무나 큰 기여를 한 교회입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유럽 선교대회때 섬기신 권순태 선교사님께서 이 교회의 역사에 대해 특별히 나누어주셨는데요. 1982년 9월, 당시 동독 사회의 핵무기 배치, 환경 문제, 인권 탄압 등에 맞서 크리스티안 퓌러(Christian Führer) 목사님의 주도 하에 매주 월요일 오후에 평화 기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89년 10월 9일 월요일, 무장한 군대와 경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교회 주변과 거리에는 약 7만 명의 시민이 촛불을 들고 모였습니다. 그 당시 소련이 탱크로 해산 시킬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고르바초프는 그 평화 시위를 터치 하지 않았습니다. 라이프치히 평화 시위의 성공은 같은 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어졌고, 이듬해 독일 통일이 실현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우연이라고 말할수 있을까요? 7년이 넘는 시간동안 매주 모여서 기도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카이로스와 그들의 크로노스의 시간이 맞아 독일 통일이라는 기도 응답이 풀어지는 놀라운 간증이었습니다. 독일의 통일 뒤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쉬지 않고 기도하던 많은 주의 백성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비전센터와 각자의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완벽하게 일하시고 응답하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그들의 기도에 도전받았습니다.
이제 루터가 공부하고, 훈련하고, 신부 서품을 받았던 에르푸르트로 이동합니다.
에르푸르트로 가는 길에 오늘 아침에 못드렸던 생명의 말씀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디모데후서 3:10-17 말씀.
디모데후서 3: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엔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며 무시했지만 나중엔 그 믿음이 삶으로 행함으로 나타나야함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루터의 삶은 자신이 믿은 이신칭의에 대해 설교도 하고 책도 쓰고 로마가톨릭과 맞서 종교개혁을 이끌었기 때문에 저는 행동하는 신앙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도 신기합니다.
유명한 루터가 번개맞을뻔한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들판 한 가운데 큰 돌이 세워져서 기념하고 있었는데요. 1505년 7월 2일, 그 당시 21세였던 루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가 오후에 방문할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장래가 보장된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방학을 맞아 집을 방문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이 돌이 세워져있는 자리에서 벼락에 맞을뻔했다가 살아납니다. 특이하게도 아버지가 광부였기 때문에 광부들의 수호신인 성안나에게 맹세를 하게 됩니다.
"도우소서, 성 안나여, 살려만 주시면 제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너무 순진하다고 할정도로 약속을 잘지키고 착하다는 독일인이어서 그런지 그는 이 약속을 꼭 지키기로 하고 아버지를 설득해 법대를 2달만에 그만 둔후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 수도회에 입회하고 수도자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가 이 벼락을 맞을뻔한 사건은 정말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렇고 루터도 그렇고 위대한 인물들은 이런 엄청난 사건으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건이 있는것 같습니다. 우리도 작던 크던 부르실때 민감하게 알아듣고 반응하여 부르심에 응답하는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루터가 신부 서품을 받았던 에르푸르트 대성당 입니다. ‘벼락 서원’ 이후 수도원에서 수도 과정을 마치고 난후 바로 이 성당에서 1507년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성당을 먼저 보여드리고 그가 공부한 아우구스티너 수도원과 에르푸르트 대학 사진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성당은 루터에게 너무 중요한 성당인데, 무려 1200년전인 8세기에 짓기 시작한 성당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보았던 성당중에 가장 긴 스테인글라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역시나 18m에 이르는 현존하는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합니다. 중세 교회에 왜 이렇게 스테인글라스가 많은지 아시나요? 라틴어로 씌여진 성경을 성도들이 읽을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성경의 내용을 스테인글라스로 만들어서 설명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11월이다 보니 해가 일찍 져서 서둘러서 에르푸르트 대학으로 이동했습니다. 우리는 캠퍼스 같은 곳을 상상했지만 우리가 도착한 곳은 건물이었는데요 1816년에 폐교되었다가, 독일 통일 후인 1994년에 재설립되었다고 합니다. 루터는 이 대학에서 문학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당시 대학 교육의 기본 과정인 자유칠과를 마침)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과에 진학하지만 2달만에 벼락 서원 사건으로 법학공부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한 곳입니다. 루터가 수학하던 시기에 이 대학은 인문주의적 경향이 강했고 그로 인해 루터가 기존의 스콜라 철학을 비판하고 성경 원전 연구에 몰두하는 데 영향을 주게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아우구스티너 수도원입니다. 소박한 수도원에서 20대의 루터가 무슨 마음으로 기도하고 고뇌하고 자신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까요? 이곳에 있을때 루터는 매우 엄격하게 수도생활을 했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죄에서 완전하게 자유할수 없기 때문에 죄의식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지금도 로마가톨릭 신자들이 여전히 느끼고 있을 죄의식과 두려움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정말 아무 공로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진리를 알고 믿음으로 우리에게 큰 자유와 평강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의 성구 말씀은 히브리서 4:19절 입니다. 이번 순례팀의 막내 빛나 자매가 알려준 히브리서 4:19 노래가 중독성이 있어서 하루종일 흥얼거리며 외웠습니다. 혹시 궁금하실까 해서 노래 링크를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MCH5t7HNQ0
히 4:19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내일은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던 바르트부르크 성, 그리고 루터의 집을 들러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합니다. 아!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루터가 처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마 위클리프나 얀후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시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독일어 번역 성경이 특별한 것은 라틴어로 된 성경을 직역하는 대신 일상적인 대중어로 번역을 해서 일반인들이 잘 알아들을수 있었고 언어와 문화에까지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내일 배워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역시 마무리는 호텔에 오자마자 예배와 은혜 나눔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호텔에서 컨퍼런스 룸에서 모일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요즘도 받지않고 넓고 쾌적한 방에서 예배할수 있게 하심에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방에서 함께 뜨겁게 찬양하고 소그룹 모임까지 오랜만에 깊은 나눔과 기도모임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 또한 진리 가운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선배들의 길을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많이 걷다보니 다리와 허리가 아프신 분들, 감기기운이 오시는 분들, 며칠째 화장실 못 가시는 분들,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시는 분들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모든 상황 가운데 승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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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nMoon님의 댓글
SeanMoon 작성일
할렐루야!
루터의 걸음을 따라가며 복음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는 현장을 보니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특히 니콜라이 교회에서의 평화 기도 이야기는 지금 우리 시대의 중보기도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의 시간에 완벽하게 응답하시는 주님” 이 고백이 순례팀과 교회 모두의 고백이 되길 기도합니다.
모든 여정 가운데 건강 지켜주시고, 걸음마다 주님의 임재로 충만하시길!
승주찬!

이시은님의 댓글
이시은 작성일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없어 스테인글라스로 가득채운 벽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어야만 했던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며 성경을 얼마나 쉽게 여겼는지 회개가 쏟아집니다. 말씀을 모르니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는 사사기 말씀도 떠오르며 매일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 읽혀지는 이 은혜를 전심으로 감사합니다. 순례팀의 영육강건을 위해, 성령님의 충만하신 감화하심을 위해 계속 기도합니다. 건강 잃지 않으시도록 기도합니다. 유럽에 다시 말씀운동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안 깊은 곳 가장귀한 보물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생생현장, 세세한 설명의 순례일지 감사드려요! Sola Gratia! 승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