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로스 12기 목요일 저녁반 - 레디컬 독후감 - 이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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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대환
조회 46회 작성일 25-12-0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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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cal
거듭남의 증거
성령을 받으라
나의 신앙의 여정에 있어 래디컬은 10년 전 지금의 새누리 교회로 적을 옮기고부터 시작되었다. 고신교단의 엄격하고 교리적인 신앙생활을 시작으로 삶으로 실천해낼 수 없는 엄청난 신앙적 무게를 견디지 못해 반항하고 거부하며 신앙인 아닌 신앙인으로 20대까지 살아갔던 것 같다. 그 당시까지만해도 성령님이란 말을 내 입밖으로 꺼낸다는건 비공식적으로 불경한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성령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그 당시까지 내가 들은 설교는 ‘주로 잘못하면 지옥간다.'는 내용들이었고 어린 시절 잠시 몸 담았던 침례교회에서는 ‘예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두 설교는 모순이다.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조금만 잘못하면 지옥으로 보내실 궁리만 하고 계신단 말인가? 그 당시 이단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던 시기고 그 당시 이단들은 성령강림, 성령세례등 아주 소중한 단어들을 남발하면서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는 반감의 단어가 되었던것이 사실이다.
많은 우여곡절끝에(이 우여곡절을 다 쓰려면 책 몇권쯤 될 듯하여) 새누리교회에 자리잡게 되었고 이내 성령님이 그 분의 존재를 나에게 드러내시기 시작하셨다. 그땐 너무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성령님이 주신 마음에서 그랬을까? “성령님~ 나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다 맡겨드립니다. 내 갈 길을 인도해 주세요.” 라고 말씀드리자마자 내 삶의 주인이 바뀌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신앙적 고민을 해 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먼저 “성령을 받으셨나요?”라고 묻는다. 그들의 고민이 성령님을 모르는 상황에 기인한다면 먼저 성령을 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기 때문이다. 성령님께 이끌려 사는 삶은 세상이 풀 수없는 문제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쉽게 풀려나가는 것을 아주 많이 경험할 수 있기에 드라마보다 재미있고, 성경과 일치하는 모든 기적들을 누리는 삶은 기쁨이 충만하다.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이 책에서 말하는 래디컬은 소위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좋은 일도 성령안에서 행하지 않으면 다 자신의 이익과 소욕을 위한 일로 변질되거나 우리 담임목사님이 늘 강조하시듯 번아웃이 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전제인 그리스도인은 성령받은 그리스도인 혹은 성령받기를 원하는, 그리하여 하나님께 쓰임받기 원하나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하는 이들이에 특효약이 될 것 같다. 이와 반대로 교회가 무엇인지? 신앙이 무엇인지 알 지 못하는 초신자들에게는 다소 겁나는 얘기들이 있을 것 같으나 이 또한 동일한 하나님의 때가 그들에게 임할 것임을 보여주는 예고편이기도 하다.
청부와 청빈
나는 이 책을 각자가 받은 은사와 은혜의 관점에서 보길 원한다. 재정의 관점에서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재물 얻을 능력을 많이 부여받은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의 재정을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쓰는데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전자를 청부, 후자를 청빈이라 부르자.
간혹 설교말씀이나 신앙서를 보면 모두에게 청빈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청빈은 아무나 하는것은 아닌 것 같다. 바울이 청빈이었고 모든 목회자들이 그렇고, 선교사님들과 하나님께 부름받아 쓰임받는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자들이 대부분 청빈이다. 청빈의 훈련은 청부의 훈련보다 고될 수 있고 외로울 수있으며 특별한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가능하다. 자신의 재정이 부족한 것만으로는 청빈이라 할 수 없다.
이에 반해 청부는 신명기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라고 하셨듯이 우리는 어떤 특별한 은사가 없이도 재물을 얻을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다만 세상이 말하는 절대기준에 빗대어 이야기한다면 많고 적음을 따져 상대적 부를 논할 수 있겠으나 내 욕심으로 구하지 않는 한 이 또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로 하면 우리는 모두 청부의 후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소유를 팔아 나누어주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남는 시간과 남는 물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음으로 작정하고 행해야 한다는 말은 모두 청부의 조건을 제시한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게 되는 것 같다, 마치 부자청년처럼. 소유가 많지 않을 땐 자신있게 작정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유가 많아지면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물질을 “내 노력으로 내가 일구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유주가 나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소유주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아버지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요구(?)에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다시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
청부가되는 조건은 내 명의로 소유한 이 모든 시간과 물질, 그리고 나 마저도 모두 하나님 내 아버지의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쉽지 않다. 매 순간 마음에 새기고 되새기지 않으면 어느새 또 내 소유가되어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이루려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유자가 명확해야 청부의 삶을 누릴 수 있다. 각자에게 주신 소유를 믿음의 분량대로 먼저 떼어 드리는 행위에 기적이 있다. 엘리야에게 마지막 먹고 죽을 떡을 준 사르밧과부가 그랬고, 조지 뮬러의 헌신의 기도가 끊임없는 기적속에 고아원을 운영해나가게 되었다. 이런 간증은 지금도 끊임없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흔한 기적들이다. 오직 믿음으로 헌신할 때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게 된다.
낙수효과
한국에 수각이라는 것이 있다. 분수처럼 물을 아래에서 위로 끌어올려 아래로 흘려보내고 다시위로 올리는 순환구조이다. 주로 공간의 장식을위해 사용되는데 먼저 위의 작은 수각 채워져 아래로 흐르고 그러면 아래에 있는 좀 더 큰 수각이 그 물을 받아 채운다. 이 물이 차고 넘치면 그 아래 더 넓은 수각으로 흐르는데 이 물이 마지막엔 흘러 다시 맨 위 가장 작은 잔으로 올라가 채우기를 반복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넘치는데 원리가 있다. 내가 먹을 것을 위해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해서 모은 돈으로 나의 필요를 채우면 그걸 넘치게 흘려 보내야 한다. 이것이 계속 반복될 때 하나님 나라의 풍요가 끝없이 이어지고 이 효과는 날로날로 극대화되어 살아있는 복음이 되어 전달이 될 것이라 본다.
예수님도 먼저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먹이셨다. 크리스찬은 남들을 먹이기위해 돈을 벌어야하고 남들을 돕기 위해 시간을 써야한다. 일턱가 전쟁터가 아니라 선교지가 되고 나를 힘들게 하는 동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할 때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밖으로 흘러나와 낙수효과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
박제된 그리스도인과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기업형 교회 VS 제자 삼는 그리스도인과 복음적인 교회며칠 전 한국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동생가족은 카톨릭인데 함께 운전을 하며 가다가 내가 물었다. “여기 건물은 뭔가요?” 검정빛 태닝이된 유리로 온 건물을 감싼 약간 고딕형 건물처럼 보이는 높고 큰 건물이 보였다. 공연장 같기도 하고 유명 아티스트가 지은 듯 한 웅장한 건물이었다. 동생이 대답한다. “교회야” … 일반상가들과 비교해도 많은 비용을 들여 지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순간 내가 왜 챙피한지…. 강남의 그 비싼 건물들을 재치고 가장 멋있고 비싸보이는 건물은 다 교회다. 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교회 건물은 세워도 비껴가고 경기도 비껴가는 듯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신심은 기독교 이전에도 무속이나 토템에서도 어느나라 뒤지지 않게 강하던 사람들 아닌가? 온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단지 무속에서 교회로 장소만 옮겨 “비나이다. 비나이다.”하고 있다면? 물론 이런 사람들은 일부일 거라 믿는다.
저자는 ‘박제된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이렇게 풀어낸다. 영적인 안전금고, 즉 예배당 건물과 선하게 살라는 윤리적 가르침 속에 완전히 고립된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온 교인이 들어갈 만큼 거대한 건울을 짓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며 주변 세계와 담을 쌓고 등을 돌린 채 일주일에 두어 시간 정도 최대한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건물을 가리키거나 주소를 적어 준다. 예배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신앙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한다….교인의 숫자가 현상을 유지하거나 조금씩 늘어나는데 만족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 보지도 못한 수십억 인구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한다….p.146
반면 ‘제자 삼는 그리스도인’은 남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고 세상으로 뛰어든다. 이들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는다. 예배당에 얼마나 많은 인원은 수용하느냐가 아니라 교회 건물을 뛰쳐나가 세상으로 들어가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제자로 만드느냐로 교회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정해진 장소에 모여 교사의 강의를 듣는 것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제자를 삼는 일은 남성들만의 모임이든, 여성들끼리 수다를 떠는 자리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해 보여 주며 , 함께 나가 복음에 목마른 세상을 섬기는 곳이라면 그 어디서나 시시때떄로 이뤄진다고 믿는다. 우리가 어떤 교회를 지향해야하는지 명확한 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아 알찌어다!
나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참 존경한다. 그의 생애에 많은 영적부흥들을 목격했고 또 사그라드는 걸 뼈아프게 경험한 목사님이자 신학자이며 그 시대의 지성이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다. 이 책에 언급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1718-1747)은 그의 생애 마지막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 사역지에 합류하고 그 딸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어렵고 힘들었던 그의 사역을 뒤로하고 눈을 감았다.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그의 생생한 기록을 본 에드워즈는 진정한 사역이 이것임을 노년에 깨닫고 데이비드의 일기를 정리해서 책으로 출간하여 지금까지도 사역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글로 남아있게 되었다. 에드워즈가 자주 한 말 중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아 알찌어다.”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해한다면, 아죽 작은 귀퉁이라도 엿볼 수 있다면 이 책 래디컬의 내용은 결코 래디컬 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며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나의 자랑스런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으로 또 오늘을 살아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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